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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02-14 22:12
신심명 강의를 시작하며.. 무비스님.
 글쓴이 : 도신스님
조회 : 1,938  
신심명 강의를 시작하며 <신심명>은 깨달음이 높으신 분의 최상 법문입니다. 깨달으신 분들의 가르침을 우리가 100%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해를 못하다 보니 설명을 제대로 하는 것도 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공부를 하면 할수록 이해가 달라지고 설명이 달라집니다. 설사 어제 어느 구절을 이해하고 설명했다 하더라도 오늘 역시 그 설명이 똑같으리라고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보통 사람들이 깨달은 분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고 설명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공부했다 하더라도 또 해야 하고, 공부하고 또 하는 과정에서 조금씩 조금씩 그 뜻이 더욱 가슴에 와 닿아, 깨달은 성인들의 마음에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는 길이 열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신심명>에 대한 책들도 많고 강의도 곳곳에서 많이 합니다. 그렇더라도 <신심명>은 금생뿐만 아니라 세세생생 공부의 과제로 삼아도 조금도 손색 없는 아주 훌륭한 가르침입니다. 그러니 이 기회에 알뜰히 공부하고 또 해야 할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강의에서는 <신심명> 원문을 직접 보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글자도 짚어 드리고 새기는 법도 짚어 드리고, 거기에 담겨 있는 뜻도 제가 아는 만큼 짚어 드리겠습니다. <신심명>은 분량이 얼마 되지 않으니 이것을 직접 100번쯤 써 보시기 바랍니다. <신심명>은 100번이 아니라, 1000번을 써도 결코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아주 보람있는 일을 했다, 큰 불사를 했다고 할 정도로 자부심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100번쯤 사경을 하시면 글자 한 획 한 획도 다 소상하게 알게 되면서 외울 수 있을 것입니다. <신심명>을 쓰고 외워서 그 뜻을 이해하고 설명을 할 줄 안다면, 어디서든지 문자를 마음대로 구사해 가면서 부처님 사상의 진수를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일생에서 그 어떤 재산보다도 훌륭한 재산을 마련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중국의 승찬(僧璨)스님께서 저술하신 <신심명>은 깨달음이 높으신 분의 최상 법문입니다. 내용이 많지는 않습니다만, 그 안에 부처님의 사상을 오롯이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과거의 조사 스님들께서도 <신심명>안에는 팔만대장경이 함축되어 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불법의 정수를 담고 있는 짧은 글을 선택한다면, 바로 이 <신심명>을 선택할 정도로 내용도 훌륭하고 문장도 빼어납니다. 내용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 신심명>을 저술한 승찬 스님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승찬스님은 보통 '삼조三祖 승찬스님'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여기서 '삼조'라는 말부터 살펴봅시다. 부처님께서 우리 불교의 정맥을 가섭존자에게 전했습니다. 그러므로 가섭 존자가 제 1조가 됩니다. 그 법을 아난 존자가 이었으니 아난 존자가 제 2조가 되고, 이렇게 해서 아시는 대로 달마스님까지 28대의 법맥이 이어져 옵니다. 그런데 달마 스님은 중국으로 건너와 부처님의 법을 중국에 전하게 되었습니다. 중국에서의 법맥은 달마스님을 제 1조로 시작합니다. 달마스님의 법을 이은 혜가慧可스님이 이조二祖, 삼조 승찬스님, 그 다음에 사조四祖 도신道信스님, 오조五祖 홍인弘忍스님을 거쳐 육조六祖 혜능慧能스님으로 법이 이어졌습니다. 우리가 공부할 <신심명>을 지은 분이 바로 삼조 승찬스님입니다. <신심명>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담고 있는 승찬 스님의 불후의 명작으로, 근래에는 육조 혜능 스님의 제자인 영가스님의 <증도가>와 함께 선시의 최고봉으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승찬스님은 수나라 앙제 대업 2년(606년) 10월 5일에 입적하셨다고 기록에 남아 있는데, 태어난 시기는 정확히 남아 있지 않습니다. 승찬스님이 돌아가신 지 150년쯤 뒤에 당 현종이 '감지鑑智'라는 시화와 '각적覺寂'이라는 탑호를 내렸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해서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승찬스님은 제 개인적으로 특별히 마음이 가는 분입니다. 그 이유는 승찬스님의 생애와 관련이 있습니다. 스님은 출가하기 전, 거사로서 법을 받았습니다. 기록에 보면 ' 대풍질'이라는 아주 무서운 병에 걸렸다고 하는데, 흔히 나병이라고 부르는 한센병입니다. 승찬스님은 출가 전, 이 병에 걸려 여러 해 동안 고생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침 달마 스님의 법을 이은 이조 혜가 스님의 소문을 듣고, 큰 도인을 만나면 자신의 병을 고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무작정 혜가 스님을 찾아 길을 떠났습니다. 어렵게 혜가 스님을 만난 승찬 스님은 이렇게 부탁했다고 합니다. " 저는 대풍질을 앓고 있습니다. 과거에 죄가 많아서 그런가 봅니다. 어떻게 참회를 하면 병이 낫겠습니까? 스님께서 참회시켜 주십시오." 이 이야기를 들은 혜가 스님은 달마 스님에게 들은 이야기와 비슷한 말을 합니다. 당신이 처음에 불안한 마음으로 달마 스님을 찾아갔다가, 불안한 마음을 어떻게 치유해야 하는지 달마스님께 묻습니다. 결국은 달마스님에게 좋은 가르침을 받고 불안한 마음이 씻은 듯이 가시게 되었는데, 이 두 분의 대화와 흡사한 내용이 이 두 분의 대화에서도 오고 갑니다. " 그대가 죄가 많아서 그런 병을 앓고 있다고 하니, 그 죄를 가져와 나에게 보인다면 그 죄를 내가 참회시켜 주겠다." 혜가스님의 말씀은 승찬스님이 상상하지도 못하던 상황입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죄를 찾을 수 없습니다. 정말 죄가 많아서 큰 병을 앓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죄를 찾아봐도 도저히 찾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하고 고백을 하니, " 그렇다면 그대의 죄는 모두 참회되었다."라고 하십니다. 혜가스님의 말씀은 죄를 찾을 수 없다면 다 공한 것 아닌가 하는 뜻입니다. 불교는 이치를 깨닫는 것이지 난행고행(難行苦行)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난행고행도 이치를 깨닫기 위한 것입니다. 한 마디 말을 듣고 이치를 깨닫거나, 고행을 해서 이치를 깨닫거나, 기도를 해서 이치를 깨닫거나, 참선을 해서 이치를 깨닫거나, 경전을 봐서 이치를 깨닫거나, 어떤 방법을 통하든지 이치를 깨닫는 것이 불교 아닙니까? 불교란 한 마디로 깨달음의 가르침인데, 바로 그 깨달음을 통해서 이해하면 그뿐입니다. 그러니 이제 그런 이해를 했으니 아무 문제 없는 것입니다. 죄의 성품이 본래 공하다는 것을 이해했다는 것입니다. 혜가 스님이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 그대는 그저 불.법.승 삼보에 의지해서 안주하라." 병을 앓으며 여러 해를 나그네로 살았으니 그 몰골이 오죽했겠습니까? 그러니 그냥 상식적인 수준에서 "불.법.승 삼보에 의지해서 살도록 하라" 라고 일러 줬습니다. 그런데 승찬스님은 불교의 불자도 모르는 사람이다 보니 처음 듣는 말입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 지금 화상을 뵙고 승보라는 것을 알았는데, 어떤 것을 불보, 법보라고 합니까?" 혜가스님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 마음이 부처다. 또 마음이 법이다. 법과 부처는 둘이 아니다. 승보도 결국은 마음이다. 불보도 마음이요, 법보도 마음이요, 승보도 또한 마음이다. 마음밖에 다른 것이 없다. 불.법.승 삼보만이 마음이 아니라, 온 우주 법계가 다 마음이다." 우리가 지금 말하고, 듣고, 책 읽고, 이런 시간을 함께 하는 것, 이것이 전부 마음이 하는 것입니다. 승찬스님은 이 말씀을 듣고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 오늘에야 비로소 죄의 성품은 마음에도 없고 마음 안에도 없고 마음 밖에도 없고, 또 중간에도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마음이 그러하듯 이 불보와 법보도 둘이 아닌 줄 알았습니다." 결국은 불.법.승 삼보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다 마음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따로 건강한 몸이다. 병든 몸이다 하는 분별을 나눌 까닭이 없습니다. 금으로 불상을 만들었든, 칼을 만들었든, 코끼리 형상을 만들었든, 오직 금일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불상을 만들었다고 그 금값이 더 나가는 것도 아니고, 코끼리 형상을 만들었다고 해서 그 금값이 덜 나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이치를 이 분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삼보, 사홍서원, 삼귀의, 사제, 팔정도, 십이연기가 뭔지 들어 본 적도 없던 분이 바로 이렇게 지름길로 불교에 뛰어든 것입니다. 지름길이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바로 정법을 만나서 한순간에 불법의 근본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혜가 스님은 승찬 스님의 법기(法器)가 아주 훌륭하다고 생각하고 비로소 머리를 깎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 그대는 나의 보배다" 라고 하시며 스님 승(僧)자, 구슬찬(璨)써서 '승찬'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해 3월 18일 광복사에서 비구계를 받았는데, 그 후 저절로 병이 나아 2년동안 혜가스님을 시봉했다고 합니다. 승찬스님은 불교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던 분이 고치기 어려운 병에 걸려서 오랫동안 고생하다가, 큰스님을 찾아가서 나눈 몇 마디를 통해 모든 것이 다 마음의 이치라는 것을 확연히 깨달은 분입니다. 그래서 승찬 스님의 인간적인 삶에 관심과 애착이 갑니다. 특히 <신심명>이라는 불후의 명작을 탄생시켜서 이렇게 오랜 세월동안 많은 사람의 소견을 열어 눈뜨게 해주신 점은 언제나 감동스럽습니다. 우리가 불자로서 <신심명>공부 한 번 못 한다면 불자로서 다른 보람이 뭐가 있겠습니까? 부처님과 인연을 맺었다면 불교 안에 담긴 뛰어난 가르침을 공부하는 그런 행복, 그런 다행을 얻는 것이 불자의 보람이고, 또 그러면서 뭔가를 얻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 외에 달리 무슨 소득이 있겠습니까? 이제 <신심명>의 제목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신심'이라는 말은 우리가 자주 쓰는 말이지만, 여기에서는 우리가 쓰는 그런 의미의 신심이 아닙니다. 부처님 전에 절을 많이 한다든지, 공양을 많이 올린다든지, 불사를 잘 한다든지 하는 차원의 신심이 결코아닙니다. 이런 신심을 염두에 두고 들으면 얼른 이해가 안 됩니다. <신심명>의 '신심'은 그런 신심을 다 던져버리고 마음의 도리를 찾는 것입니다. 믿는 마음이라고 하는데, 믿는다는 것과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또 믿는 마음의 실체는 무엇인고 실상은 무엇인가? 이런 것을 찾는 것입니다. 신앙심이 아주 돈독해서 일상생활에서 예불 많이 하고, 염불 많이 하고, 공양물 잘 올리고, 삼천위의(三千威儀)의 팔만세행(八萬細行)을 잘 갖추어서 행동거지가 모범적인 것도 물론 좋은 신심입니다. 그렇지만 <신심명>에서는 그런 이야기는 한 마디도 없습니다. 그야말로 우리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의 근본이고, 그런 근본을 제대로 이해함으로써 우리의 삶이 바르게 되며, 인생을 살아가며 누릴 수 있는 최상의 행복과 보람을 바로 이 신심이라는 한 마디에서 찾을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심이라는 말은 우리 인생을 극대화시키는 말이고, 우리 인생을 가장 의미 있고 보람있게 해주는 말이며, 우리들에게 정말 멋진 삶을 약속하는 말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신심명>에서 '신심'이라는 것은 우리가 신앙심을 거론하며 부처님을 향해 신심이 있다고 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근본 문제, 또 그 마음의 문제를 통해서 이상적인 삶을 어떻게 엮어 갈 것인가 하는 문제가 신심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신심명> 첫 구절에 나오는 '지극한 도'입니다. 아주 멋진 도, 멋진 인생, 이상적인 인생, 그리고 인생의 이상적인 삶의 태도, 이것이 지극한 도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결코 어렵지 않다고 합니다. 이려지는 않지만 오직 가려내고 선택해서 내것으로 만드는 일, 이것만 꺼릴 뿐이라고 합니다.. 이것만 유의해서 하지 않으면 된다고 합니다. 이제 이런 이야기가 꾸준히 이어집니다. 일단 서론을 대신해 승찬 스님 이야기와 <신심명>의 제목에 대해서 전해드렸습니다. 특히 승찬스님은 오랫동안 병을 앓다가 이조 혜가 스님을 만나 짧은 대화를 통해 후련하게 깨닫고 부처님의 법맥을 이은 분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승찬스님의 인생에 더욱 애착과 관심이 갑니다. 또 <신심명>이 워낙 함축된 문장에 뛰어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신심명>의 내용을 전해 드리려는 것입니다. ... 무비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