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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읽는 조선민족사(朝鮮民族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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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석가모니 작성일2013.07.28 조회8,08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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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경순왕(경주 김씨의 시조)은 신라가 전삼한 후삼한 통일사업을 할때에 당(唐)과 연합을 하였지만 결국은 당(唐)과 전쟁을 한 무열왕과 문무왕의 역사를 상고하고 5대 10국의 혼란기의 동북아 정세의 후삼국시대를 맞이하여 오랫동안 북국(北國) 발해와 한반도 통일신라(統一新羅)가 지난한 국경분쟁속에서 수도를 충주를 옮기려 하였는바 경주 귀족세력들의 반발에 의해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래서 후삼국이 각기 통일의 왕자(王者)가 되려 서로가 삼한통일의 비젼의 리더쉽을 제시하려 할때에 왕건과 합종연횡하여 고려라는 호족공화국을 건설할 때 왕위다툼으로 내분에 빠져 있는 후백제의 견훤의 동의를 얻어 후삼국 통일의 약식절차인 전쟁을 거쳐 후삼국을 통일 고려를 건국하였다. 그후 신라귀족 김함보(신라의 골품제도에 의한 경순왕의 친척)는 일가(一家)를 이끌고 60세에 고려에서 떠나 장백산(지금의 백두산)일대에서 마을을 이루어 부족장(部族長)이 되었는데 이를 완안부라 이르고 후에 김함보의 후손 아구다가 완안부의 영웅(英雄)이 되어 발해 유민, 정안국 유민들과 함께 금(金)이라는 나라를 건국하였다. 금(金)나라는 김씨의 나라란 의미이다. 그후 금은 거란을 서쪽으로 밀어내고 중국대륙 북방을 아우르고 몽고와 대적한 대륙의 왕자(王者)가 되었다. 그리고 칭기즈칸의 몽골제국 이후 만주에서 금(金)의 후손인 애신각라 누르하치가 지진과 홍수에 빠진 중국대륙에서 건주위 족장으로써 후금(後金)을 건국한 후 만몽한(滿蒙漢)(만주족, 몽고족, 한족 연합) 연합정권을 세워 청(淸)을 건국하였다. 여기서 만주족이란 누르하치가 압록강, 두만강, 이북지역, 흑룡강, 송화강 이남지역간의 부족전쟁(部族戰爭)을 거쳐 부족통일 후 여진족이란 민족명을 만주족(滿州族)으로 바꾼 것입니다.

여기에서 애신각라(愛新覺羅)란 누르하치의 성(姓)은 결코 신라(新羅)를 잊지 말자는 뜻입니다.

지리적으로 한반도의 태백산맥 줄기는 북으로 개마고원을 거쳐 백두산에 이르러 다시 대흥안령에 닿아 송화강과 흑룡강에서 만주대륙과 몽골이 연결됩니다. 그러니까 태백산맥 줄기만 전술적으로 잘타고 올라가도 신라의 화랑이 산줄기를 타고 몽골까지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실의 기초사서가 청나라 황실의 만주원류고(滿州源流考)가 되겠습니다. 몽고가 금나라를 공격할때 금나라의 일파가 동진(東進)하여 두만강가에서 나라 이름을 동진(東辰)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조선 민족 초기국가의 이름이 마진이었고, 발해 또한 진(辰)이라 하고 또는 고구려, 고려라 한바 발해는 중국측의 기록입니다. 때문에 동북아시아사를 볼때에는 황하문화권, 동북요동을 잇는 만주 한반도지역, 몽골고원, 그리고 일본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태종 무열왕 김춘추와 화랑도)(花郞道)

바야흐로 열국시대(列國時代)를 이은 후삼한 삼국시대 말기에 삼국(三國)에 각기 걸출한 영웅(英雄)이 있었으니 신라의 김춘추, 고구려의 연개소문, 백제의 의자왕 이었다.

신라의 김춘추는 뛰어난 정치가이자 외교가로써 정치적으로 가야의 왕(王)의 후손인 김유신과 결혼동맹을 맺어 신라진골(新羅眞骨) 정통과 가야계(伽倻系) 무장세력(武裝勢力) 가야계 화랑(花郞)과 연합하여 거대 정치무장세력을 이루고 당과 연합하였는데 본시 풍습(風習)이라는 것이 지리적풍토(地理的風土)에 영향받는 바뀔 수 없는 인종(人種)의 생활습관인 바 김춘추는 짐짓 이 사실을 알고 당태종에게 신라의 풍습을 당풍(唐風)으로 바꾸겠다고 한 다음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린 후 항시 당나라의 야욕을 경계하였다가 김유신과 함께 화랑(花郞)이 당나라와의 다수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후 고구려, 백제, 신라가 하나로 통일 되었다. 이후 통일신라의 화랑(花郞)들은 태백산맥 줄기따라 백두산을 거쳐 넘어 만주를 넘나들기를 수 없이 하여 호기(豪氣)로운 무용(武勇)을 뽐내었다. 이것이 바로 신라(新羅)의 화랑도(花郞道) 낭가(郎家) 이다.

종교, 정치, 경제, 지리, 사회, 군사적 지식을 바탕으로 객관적 입장에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그리고 기타 사서(史書)를 읽으면 그 글들속에 진정한 화랑(花郞)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역사에 관련된 소설이나 사서의 기록을 고증할때에 한글로 풀어쓸수도 있지만 풀어 쓸 수 있는 부분이 있고 풀어쓰지 못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예를 든다면 금(金)의 일파가 동진(東進)하였다고 하는 부분에서 금의 일파가 동쪽으로 나아가 두만강가에 이르러 동진(東辰)을 나라를 세웠다고 할 수 있으나 금(金)이나 두만강이나 동진(東辰)과 같은 고유명사는 한글로 풀어쓸 수 없으며 즉 현대이전의 역사시대(歷史時代)의 고유명사들은 그대로 한자문명권인 관계로 한문을 그대로 쓸 수 밖에 없습니다.여기까지는 조선민족의 정치의 역사였습니다. 종교의 역사는 별도로 있습니다. 화랑도의 경우 화랑세기를 읽어보면 화랑의 생활풍습과 무사(武士)와 선도(仙道)가 별도로 기술되어 있음을 알수있습니다.

또한 민족(民族)이나 부족(部族) 또는 씨족(氏族)을 호칭할 경우에도 국가(國家)와 정권(政權)이 변천됨에 따라 호칭도 변천되어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역대 왕조의 왕들은 자기 자식들이 한정된 자원을 가지고 싸우는 권력투쟁의 왕이나 왕자보다는 민심(民心)을 아우르고 백성들의정신적 지주가 될 수 있는 종교지도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수 많은 왕자들이 종교적 자질이 부족하여 종교인이 되지 못하고 정치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즉 과거의 인연이 없으면 현세에 있어서 수행을 한다 하여도 속세로 환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라의 진흥대왕이 말년에 출가하여 스님이 되신 것입니다. 즉 진흥대왕께서는 화랑도를 창건하고 영토를 개마고원 넘어 백두산을 거쳐 만주까지 확장하고 선정을 베풀었으며 말년에 출가하여 스님이 되어 불법(佛法)을 널리 반포하여 수 많은 중생을 구제 하였습니다. 그리고 신라가 신라일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화랑도 때문입니다.

그래서 삼국유사를 쓰신 일연 스님께서 연개소문과 김유신을 일컬어 기술하시길 연개소문은 전생에 고구려와 당나라에 원한을 갖고 죽은 수나라 장군이었고 김유신은 고구려 왕조에 의해 억울하게 죽어 원한 맺힌 점쟁이라고 쓰신 것입니다.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막리지가 되어 군권(軍權)을 장악해 고구려의 중신들을 죽이고 당태종을 죽임으로써 수나라의 원한을 갚았고 김유신은 백제를 멸망시키고 고구려를 멸망시켜 자신의 원한을 갚은 정치인(가야의 왕)이 된 입니다. 즉 일연스님은 불법(佛法)의 연기법(緣起法) 인과(因果)로 역사(歷史)를 기술하신 것입니다. 만일 대야성에서 김춘추의 딸과 사위가 죽지 않았다면 김춘추 또한 집요하게 백제를 멸망시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서(歷史書)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 왕(王)이란 백성과 같은 생각을 하고 백성과 함께 뜻을 같이하고 백성과 함께 같이 먹고 마시며 함께 생활하는 자이다. "

현대의 21세기에도 대한민국에는 고조선, 신라, 고구려, 백제, 동예, 옥저, 말갈, 가야, 발해, 고려, 조선의 후예들이 각기 자본주의 상업제국을 건설해 활발히 활동하며 대한민국의 헌법인 자유민주주의 사회를 향유하고 있답니다.

금나라 태조 아구다가 중국의 북방을 정복한것이나, 청나라의 도르곤이 북경에 입관한 것은 고조선 시대의 옛 강역 북경, 태원, 난하 서부유역을 다물한 것으로 비유하자면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나, 연개소문, 백제의 근초고왕이 북경이나, 태원에 입관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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