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花郞) 1만리(제3화 씨족에서 부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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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석가모니 작성일2013.06.26 조회8,002회 댓글0건본문
세월이 흐르고 화산재에 뒤덮힌 백두산 주변으로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고 폭풍이 불고 그 틈을 타고 백두산 능선을 타고
새생명은 봄에 돗아 여름에 생장하고 가을에 절정에 올라 겨울에는
동면에 들어가며 점점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땅으로 변화되고 있었다.
김함보를 중심으로 신라귀족과 화랑은 백두산어귀 북쪽에서
화전(火田)을 일구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중에는 남성만 있는것이
아니어서 새로운 백두산 신라인(新羅人)이 탄생되고 있었다.
즉 김함보를 중심으로 한 신라인 씨족사회가 점점 커지고 있었고
이에 따라 백두산 화산폭발에도 살아남은 발해인과 말갈인과 접촉하는
일이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
김함보와 신라귀족과 화랑들은 백두산주변에서 어로와 수렵을 하면서
때때로 발해인과 동단국의 거란인과 말갈인과 충돌을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전투나 전쟁이 능사는 아니었다. 그래서 김함보는 삼한(三韓)
조선족의 같은 뿌리인 발해인과 결혼동맹을 시작으로 점점 더 신라씨족
사회가 발해인과 말갈인과 혼합된 부족(部族) 공동체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신라인과 발해인 그리고 말갈인의 생활풍습이 달라 이들을 조율
조정해 줄 수 있는 인간문명(人間文明) 공동체적 기본조건이 법률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이를 김함보가 만들기 시작하며 신라귀족과 화랑을 지칭해서
완안(完顔)이라 일컬었다. 완안이란 여진어로 왕(王)이란 뜻으로 만주평원의
옥(玉) 문명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이는 통일신라 북진파인 화랑집단과 결혼
동맹을 맺어 부족군장국가(部族君長國家)를 만들어 거란의 동단국과 발해의
부흥국가인 흥료국, 후발해, 정안국과의 별개의 국가를 만든 신라 화랑집단을
일컬어 완안부(完顔部)라 거란과 고려가 지칭하였다.
하지만 이때의 만주일대는 백두산 화산폭발의 피해로 인해 통일된 정치국가가
없었기에 거란의 요제국과 고려는 스스로 황제국을 일컬으며 평화와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백두산 주변과 만주평원 일대는
서서히 비옥한 땅으로 변화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백두산의 동북에 위치한 까닭은 서쪽의 거란과 남쪽의 고려로부터
견제를 받지 않고 국력을 키워 세력을 확장하기 위함이었다.
비가 내리고 폭풍이 불고 그 틈을 타고 백두산 능선을 타고
새생명은 봄에 돗아 여름에 생장하고 가을에 절정에 올라 겨울에는
동면에 들어가며 점점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땅으로 변화되고 있었다.
김함보를 중심으로 신라귀족과 화랑은 백두산어귀 북쪽에서
화전(火田)을 일구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중에는 남성만 있는것이
아니어서 새로운 백두산 신라인(新羅人)이 탄생되고 있었다.
즉 김함보를 중심으로 한 신라인 씨족사회가 점점 커지고 있었고
이에 따라 백두산 화산폭발에도 살아남은 발해인과 말갈인과 접촉하는
일이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
김함보와 신라귀족과 화랑들은 백두산주변에서 어로와 수렵을 하면서
때때로 발해인과 동단국의 거란인과 말갈인과 충돌을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전투나 전쟁이 능사는 아니었다. 그래서 김함보는 삼한(三韓)
조선족의 같은 뿌리인 발해인과 결혼동맹을 시작으로 점점 더 신라씨족
사회가 발해인과 말갈인과 혼합된 부족(部族) 공동체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신라인과 발해인 그리고 말갈인의 생활풍습이 달라 이들을 조율
조정해 줄 수 있는 인간문명(人間文明) 공동체적 기본조건이 법률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이를 김함보가 만들기 시작하며 신라귀족과 화랑을 지칭해서
완안(完顔)이라 일컬었다. 완안이란 여진어로 왕(王)이란 뜻으로 만주평원의
옥(玉) 문명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이는 통일신라 북진파인 화랑집단과 결혼
동맹을 맺어 부족군장국가(部族君長國家)를 만들어 거란의 동단국과 발해의
부흥국가인 흥료국, 후발해, 정안국과의 별개의 국가를 만든 신라 화랑집단을
일컬어 완안부(完顔部)라 거란과 고려가 지칭하였다.
하지만 이때의 만주일대는 백두산 화산폭발의 피해로 인해 통일된 정치국가가
없었기에 거란의 요제국과 고려는 스스로 황제국을 일컬으며 평화와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백두산 주변과 만주평원 일대는
서서히 비옥한 땅으로 변화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백두산의 동북에 위치한 까닭은 서쪽의 거란과 남쪽의 고려로부터
견제를 받지 않고 국력을 키워 세력을 확장하기 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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