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대전쟁 이후 남북국 시대의 종결과 만주의 무정부상태에서 금나라의 성립에서 청나라까지의 역사성립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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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석가모니 작성일2013.06.12 조회8,375회 댓글4건본문
사국시대(고구려,백제,신라,가야)의 종결은 백제와 신라 그리고 왜와 가야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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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님의 댓글
석가모니 작성일
이 글은 한족(漢族)의 기가막힌 붓장난 동북공정으로부터 자랑스런 조선민족(朝鮮民族)과 자유 대한민국 그리고 무도인들을 지키기 위한 글입니다.
고구려는 흉노와 돌궐, 유연과 동맹을 맺은 상태에서 실크로드를 확보하고 요동과 화북의 선비족 후연이나 북연 또는 북위 그리고 수당제국과 전쟁하기 이전 반드시 백제와 신라를 침공하였다. 이를 단재 신채호 선생께서는 북수남진(北守南進) 또는 북진남수(北進南守)라고 한다.
씨족 신라계 북방민족 완안부가 부족국가에서 왕조국가 대금국(大金國)이 성립되었을때는 씨족 공동체도 아니고 부족 공동체도 아니고 왕조국가이기에 고구려의 후예와 발해인과 흑수말갈인이 참여하고 대금국이 황하이북을 아우를때는 재능있고 능력있는 한족(漢族)도 대금국 조정에 등용되었다.
석가모니님의 댓글
석가모니 작성일
이와 같은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21세기 2013년 6월 현대 현재에도 인종이나 국가가 달라도 정부나 기업에 등용되는 사례와 똑같이 생각하면 됩니다. 즉 정치 통치원리상 다른 국가를 정복한다 하여도 정치세력의 정치 의지만 꺽으면 될 뿐 모든 사람을 학살할 수 없고(정치의지를 꺽지 않고 저항하는 세력만 공격하면 된다.) 정주민은 그대로 그 땅에서 살고 통치를 받으며 살며 되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유목민은 유목을 그대로 하고 농경민은 농경을 그대로 하는 체제의 통치체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거란은 남송을 공격하기전 고려를 공격하였고 금나라도 요나라를 공격하기전 고려를 공격하였고 일본이 임진왜란을 일으키자 명나라는 조선출병을 하였고 청나라는 명나라를 공격하기전 조선을 침공하였고 근대에는 일본이 다시 조선을 침략하자 청나라는 조선의 종주권을 지키고자 청일전쟁을 일으켰고 6.25때에는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이 한반도에서 충돌하였다.
석가모니님의 댓글
석가모니 작성일
즉 대금국(大金國)의 성립은 백두산 화산폭발 후 발해멸망으로부터 90년만의 대사건이다.
양자강 이남 지역과 인도차이나 반도의 중간지대는 당나라가 분열한 5대10국이 북송으로 통일되고 북송이 거란의 요나라에 의해 남쪽으로 밀려나 양쯔강을 방어선으로 하여 남송을 재정립후 양쯔강 이남이 적극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하였다.
중국의 서진 멸망 후 당제국으로 중국이 다시 통일된 것은 중국역사에서 590년만의 일로써 당의 황제 당태종과 당나라의 명신 위징간의 군신(君臣)간의 중원의 분열에서 재통일까지의 역사적 사적을 살피며 정치를 살핀 대화록으로 당나라의 명신 위징이 죽자 당태종은 정치적 제어력을 상실하였다.
아래의 글은 중원의 최고의 제왕학(帝王學) 정관정요에 대한 글입니다.
고려 윤관의 여진 정벌이 실패한 근본적 원인은 왕조정치(王朝正治) 체제에 있어서 왕조정치의 종주(宗主)이자 근본인 왕(王)이 사치하고 문란하고 부패하고 방만한 정치를 하였기 때문에 윤관의 별무반 고려군의 사기를 제왕 자신이 꺽은데 있다.
석가모니님의 댓글
석가모니 작성일백제 멸망 당시 백제부흥군의 저항운동이 3년간 지속되었고 후에 후백제가 일어난것으로 미루어 보았을때 의자왕은 상당한 영걸의 군주였음을 알 수 있고 통일신라가 끝내 궁벽한 경주에서 수도를 한반도의 중심 충주로 옮기지 못한 것은 경주주변 신라귀족의 반대 때문이었으나 후에 후삼국시대때 통일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의 골품제도격 친척인 김함보를 중심으로 한 신라귀족 무리가 북진하여 백두산일대에서 부족국가 완안부를 이루었고 청나라의 건국신화 누르하치의 조상설화도 백두산에서부터 시작된다.